6.25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상처를 남겼다.

데스크
국가보훈처

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72주년 된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쪽을 침략하며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까지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된 전쟁이었다.

서울을 2번이나 빼앗기고 수복했고,

전국토의 80%가 전쟁터가 되었다.

민간인과 군인 사상자도 500만 명 정도에 이르고,

이산가족, 전쟁고아, 피란민 등이 발생했다.

전쟁의 원인은 남한과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때문이다.

광복 후 남한은 미국식, 북한은 소련식 정부 수립을 원했으나 결국 합의하지 못한채 각각 정부를 세웠다.

당시 남북한은 자기들의 방식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단독 정부를 인정하고 살면되지 왜 꼭 하나의 방식으로 통일을 부르짖었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45년 광복 이전까지는 하나의 나라였기에 당시 입장은 하나의 나라가 되는 게 정상인 것이었다.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남침을 했다.

1950년 6월25일 시작된 남침으로 이승만대통령은 한강다리까지 폭파하며 서울을 떠났고 3일만에 서울은 함락되었다.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1950년 9월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이 다시 전세를 회복했다. 국군은 서울을 수복하며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다. 곧 전쟁이 끝날 듯 했다.

그러나 중국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1.4후퇴!가 시작되었다.

결국 북한군과 중국군이 서울을 다시 점령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파괴되는 지를 박완서 작가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으나 38선 일대는 계속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1951년 1월부터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이뤄질 때까지 전투에서 사망자만 늘어갔다. 한국전쟁 사망자의 대부분이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이 2년 동안 발생한 것이다. 영화[고지전]을 보면서 울분을 토했다. 사람의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취급하는 전쟁의 폭력성이 잘 드러난다.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유엔군대표, 북한인민군대표, 중공인민지원군대표가 서명했으나 남한의 이승만대표는 통일을 주장하며 서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국군작전권을 유엔군에게 맡겼기에 서명의 권한은 없고 참가 자격만 있었을 것이다. 이승만대통령은 남한 대표로서의 명분만 내세운 것이 아닐까…..

전쟁은 멈추었으나 끝난 게 아니다.

한반도는 지금 휴전 중이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실제 사연이다. 1937년에 북쪽지방이 고향인 신부가 서울로 시집을 왔다. 신부의 오빠가 1950년 전쟁이 터지자 북한지역이라 북한군이 되어 여동생 집을 다녀갔다. 서울이 수복되자 동네사람들이 빨갱이 집안이고 부역자라 신고하여 신랑이 총살되었다. 그런데 이 신랑의 남동생은 국군으로 근무 중이었다. 형님의 어린 아들을 1.4후퇴 때 군용차로 부산까지 데리고 갔다고 한다. 그 뒤로 신부는 한 번이라도 친정집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남긴 수많은 상처가 아직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데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유와 평화가 다시 위협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지금 세대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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