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집과 산 자들의 집이 공존하는 아미동 비석마을

데스크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 주거지]가 부산시의 첫번째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 주거지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 주거지는
부산 서구 아미동 2가 229의 2 등 2필지의 토지와 상부 시설물들을 포함한다.

부산의 아미동 비석마을은
부산대학교병원과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가 근처에 있고
부산 지하철 1호선 토성역에서 걸어서 17~20분정도 걸린다.

집터가 된 비석
담장이 된 비석

2021년 6월 부산 서구청에서는 이번 등록문화재를 포함한 일대의 9채를 한국전쟁 피란민들과 산업화시기 도시 서민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피란생활박물관’으로 조성해 역사 교육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역사교육장으로 운영중

부산 아미동 비석마을

피란민들이 만든 비석마을

한국전쟁이 터지자 사람들은 아래로 아래로 피란을 왔다. 밀리던 국군이 낙동강에서 버티며 대구와 부산은 파괴되지 않을 수 있었다. 피란민은 부산까지 내려왔다.

1949년 부산 인구는 47만명이었지만, 전쟁 이후인 1952년엔 85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부산 여기저기에 피란민이 살기 위해 집을 지었다.
부산 지형이 평지가 적고 앞으로는 바다이고 뒤로는 산이다. 어디에 집을 지을 수 있겠나. 일제강점기부터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온 사람들이 산 허리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여기에 한국전쟁의 피란민들까지 산비탈에 자리를 잡았다. 이중섭도 범일동 산비탈에 자리를 잡았다. 이 산비탈에 마을이 생기고 길이 나고 도로가 생겼다.
아미동 산비탈에도 마을이 생겼다.

아미동 까치고개와 비석마을


아미동 꼭대기에는 까치가 많았다고 한다. 그 고개를 까치고개라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아미동 꼭대기에 화장장과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화장 후 제사를 지낸 음식들때문에 까치가 모여들어 까치고개가 된 것이라 한다.

1945년 조선이 독립을 했고 일본인들은 물러갔으나 일본인 묘지는 남았고 방치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피란민은 기차를 타고, 또 기찻길을 따라 부산역으로 왔다. 머무를 곳이 필요했던 피란민들에게 아미동 주소가 알려졌다. 피란민들은 산 사람은 없고 묘지와 비석만 있는 그 곳에서 비석을 벽으로, 바닥으로 삼아 집을 지었다. 이렇게 생겨난 곳이 아미동 비석마을이다. 현재는 무덤 비석으로 만든 집이 9채가 남아있다고 한다.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로 거듭나다

비석마을은 산 자의 집과 죽은 자의 집이 남아 있는 역사적 공간이자 한국전쟁 당시의 피란민 생활과 주거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비석마을 일대는 향후 역사문화유산 보존과 주민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역사보존형 지구단위계획이 수립될 예정이라고 부산시는 밝혔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도 추진 중이다.

이웃마을은 감천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마을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감천문화마을이다. 감천문화마을도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이다. 모두가 산비탈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사하구청 감천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을 둘러보며 그 공간의 역사적 가치를 새길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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