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왕비와 세자빈

데스크

왕비가 되는 일반적인 경로는 왕의 아들과 결혼해서 남편이 왕이 되면 아내는 왕비가 되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도 세자의 아내인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 세자가 왕이 되면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에서 정작 이 경로를 거쳐 왕비가 된 인물은 단 6명 뿐이라고 한다.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 박씨,
현종의 왕비 명성왕후 김씨,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 김씨,
경종의 왕비 선의왕후 어씨.

반면 결혼 후 남편이 변칙으로 왕이 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이는 11명,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가 된 경우가 7명이다. 이러한 통계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되지 않으며, 궁궐 내 생활이 얼마나 불안하고 살벌했는지를 드러내는 수치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럼 세자빈 – 왕비 – 대비의 세 과정을 거친 조선의 왕비는 과연 몇명이나 될까?

세자빈에서 왕비가 된 6명 중 직계 아들이 왕이 되어 대비가 된 경우는 현종의 왕비 1명 뿐이다. 조선의 왕위 계승에 그만큼 변수가 많았다는 것이다.

세자빈이 되었다해도 남편인 세자가 요절해버리면 왕비가 될 수 없었고, 다행히 남편이 임금이 되어도 남편이 중간에 쫒겨나거나, 남편과 강제 이혼당하면 왕비 자리에 있을 수가 없게 되었다.

아들이 왕이 되어도 대비가 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는 왕비였다가 쫒겨나 사약 받고 죽어 대비에 오를 수 없었고,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장희빈)도 중전에서 강등되어 희빈이 되고 끝내 사약을 받고 죽어 대비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도 대비가 될 수 없었다.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아들까지 낳았으나 남편 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어머니 영빈이씨로 부터 내쳐져 결국 뒤주 속에서 죽게 되고 본인은 강등되어 사가로 나가게 되었다. 결국 왕비가 되지 못한다. 아들 정조는 영조의 죽은 큰아들의 양자로 입적되어 임금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본인은 대비 자리에 오를 수 없었고 ‘혜경궁’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혜경궁 홍씨는 아들이 왕이 되고, 손자가 왕이 되는 것을 지켜보며 자신의 삶을 기록한 [한중록]​을 남기기도 했다.

왕비는 되지 못했으나 대비 자리에 오른 대단한 인물도 있다. 인수대비!
세자빈이었으나 왕비가 되지 못하고 물러났지만 결국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 대비가 되었다. 시아버지가 수양대군으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자 남편이 세자가 되고 본인은 세자빈이 되었다. 그런데 남편이 일찍 죽어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세자 자리는 시동생(예종)에게 넘어가 버린다. 그러나 예종도 어린 아들을 남기고 일찍 죽게 되면서 당시 최고 권력자 한명회의 도움을 받아 다음 임금 자리를 자신의 둘째 아들이 잇게 만든다. 바로 성종. 그리고 본인은 왕비 칭호를 받고 단숨에 대비로 올라섰다. 그런데 한명회 딸이 성종의 첫째 부인이었는데 일찍 죽으면서 연산군의 생모가 왕비가 되었다. 이가 폐비 윤씨. 폐비 윤씨가 사약을 받는데 역할을 했다고 후일 연산군이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들이받아 죽게 만든다.

세자빈에서 왕비가 되는 일이 순조롭지 않음을 역사가 보여준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음이 세상 일인가 여기면서 마음을 다잡고 산다면 우리가 조금은 더 여유롭게 삶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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